왕씨종묘


왕씨종묘는 왕공사(王公祠)라고도 하는데 강언지구에는 최초로 건설된 규모가 큰 사당이다.주로“회남왕씨 삼현 왕간, 왕동, 왕정에 제사를 지내는데, 명나라 태주의 학파의 중요한 강학장소이기도 하고,태주강언지구에 역사가 오래되어 문화적 저력이 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명청특색을 겸비한 민가고건축이다.

독서루

태주학파는 왕간이 가정6년(1527)에 개척한 민간학파다.안균,하심은을 거쳐  이지와 탕현조, 원홍도, 서광계 등이 발양되어 17세기 30년대까지 전후 100여 년 이어졌다.태주학파는 학술사상이 많아 철학, 사회, 윤리, 교육 등 여러 방면을 포괄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왕간(王艮)의 '인민일용즉도(百姓日用即道)'와 '안신입본설(安身立本说)'은 왕간 사상의 섬광점과 태주학파의 취지로 뚜렷한 인민성을 지니고 있다.

귀재초당

왕간(王艮, 1483~1541)의 본명은 은(银), 자는 여지(汝止), 호는 심재(心斋)이다.중국 철학사에 영향을 많이 미친 평민 철학자이며 계몽 교육자, 태주학파 창시자이다.광덕복초학원, 태주안정서원, 금릉신천서원, 양주감천서원, 안풍동 타오정사 등에서 강의를 했다.그의 사상은 명나라 중엽 이후의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심지어 "54" 신문화 운동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사회 진보에 대한 추동도 볼 수 있다. 저서로는《왕심재전집》이 있다.

왕동청동 조각상

왕동(王栋, 1503~1581)은 융길(隆吉), 호는 일암(一庵), 왕간족제(王艮)이다.중국 명대의 유학자, 유명한 사상가, 교육가이다.산동 태안주학, 강서남풍교유, 심주학정을 거쳐서 70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강언으로 돌아온 뒤 '귀재초당'을 만들어 학문을 강의하여 도를 전했다. 왕동은 백록동서원, 남창정학서원, 태주안정서원의 강학을 담당하도록 초빙되었다.태주 학파의 '거수'로 불린다. 저서로는 《왕일암집》《사당기사》등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왕씨명인화랑

왕벽(15111587), 자는 종순( 宗顺), 호는 동애(東崖)다.왕간의 차자이며, 태주학파 사상의 전파와 광대자다.남창녕국수서원, 강서길안서원, 복건흥화, 건녕서원, 쑤저우, 의진, 금릉 등 수많은 서원에서 강의를 했다.그는 평생 청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민간에서 강의를 했다.